75년부터 방위로 근무하면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76년 4월 방위에서 해제되었으나 도시로 나가는 것은 아버님의 간곡한 만류로 포기하고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산에 조림 허가를 받아서 벌채를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초 겨울부터 시작된 일은 매일 아침부터 어두울때까지 계속 되었다
허긴 그해에 장만한 나무로 10여년을 땔나무를 안하셔도 되었으니 그 양은 무려 짐작할수 있으리라
벌채를 하고 있던 11월 말 이었다
마침 서울에서 야간업소에서 밴드생활을 하다가 폐결핵으로 내려와 치료가
다되어 건강을 되찿은 친구가 산으로 찿아 왔다
그친구는 이번에 공무원 시험이 있는데 한번 응시해 보자고 했다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무조건 해 보란다
그러면서 당시 감춰두었던 비상금을 (1만원 정도로 기억한다) 주면서 책을 사다 보라고 한다
아버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헛바람 들지 말고 농사에나 전념하라는 엄명이다
그 둘의 사이에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책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일이 터졌다
밤에 전기세 많이 나오게 불켜놓았다고 야단이시다
(당시에 전기가 막 들어왔고 대부분은 10촉짜리 전구를 썻지만 석유 등잔불에 살다가 요금이 나오니 불을 제대로 켜지 못하게 하였던 시절이다)
할수 없이 이불로 문을 모두 가리고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12월 초부터 그 이듬해 1월 초 시험보기까지 40여일이었는데 아침부터 산에가서 벌채를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한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고살기로 했다
정말 절박한 심정이었다
당시 수험서는 한권이었는데 30여일이 되니까 책 전체를 외울 정도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싶다
시험을 보러 수원으로 갔다
당시에는 돈도 없어서 새벽3시경에 집에서 2시간 이상을 걸어 나와서
6시경의 첯차를 타고 수원으로 가서 수험장에 들어 갔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가서 조금 있으니 응시생의 거의 전부가 학생들이었다
수험서를 다 외우다시피 했으므로 자신에 차 있엇는데 그들을 보는 순간 그자신감은 사라지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시험지를 받아 들어 보니 너무도 쉬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이리도 쉬운데 이애들은 얼마나 쉬웠을까
시험이 끝나고 밤중에 집에 도착한 나는 기대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시험장분위기를 전하면서 기대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합격자 발표도 보지 않고 열심히 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찿아와서는 혹시 이번에 공무원시험을 이천으로 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내 이름이 거기에 있더라구...
그래서 이장집으로 가서는 군청에 확인을하니 합격이란다
다시 면접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면접시험에서는 어느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최종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76년 5월 10일 그날도 논갈이를 하고 잇을때였다
아내가 그야말로 맨발로 뛰어 오고 있었다
임용 통보 전보가 왔다
그길로 내려가 군청에 확인하니 내일 아침까지 오란다
그길로 이천으로 향하여 이발도하고 이튿날 발령을 받았다
전날이 임용이라 경상도에서 온 분들과 4명이 받았던것 같다
그럼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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